#12 편집자를 위한 책
박지혜, <중쇄 찍는 법>(2023)
<중쇄 찍는 법>, 박지혜(지음), 유유, 2023년.
이 책은 오직 편집자만을 위한 책 아닐까요?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자에게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중쇄, 즉 책의 2쇄를 찍는 일이에요. 저만 해도 그렇네요. 지금까지 수십 권을 만들었지만 중쇄를 찍은 책은.. 절반은커녕 업계 평균인 20퍼센트도 안 되겠어요.
이 책의 핵심 물음은 이거예요. ‘편집자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중쇄를 찍을 수 있을까.’ 저는 이 물음에서 핵심이 주어에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은 저자도 디자이너도 마케터도 아닌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묻고 있어요.
편집자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제조업 종사자입니다. 편집자가 만드는 책은 표지와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편집자는 우선 본문(text)을 만들어요. 원고를 집필하는 저자와 의견을 주고받고 초고를 본문으로 가공합니다. 그다음 표지(cover)를 만들어요. 표지에는 문안, 즉 제목과 카피가 있죠. 편집자는 문안을 통해서 협업자들에게 디자인과 홍보 방향을 가리켜요.
(편집자는) 1차적으로 물건을 잘 만들어야 한다. (…) 작가가 창조한 세계 혹은 정보를 얼마나 정교하게 ‘책의 모양으로 구현해’ 쓸모를 만들어 내느냐는 제조의 영역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제목을 짓고 차례를 꾸리고 교정을 보고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모든 영역이 종국에는 ‘제조업’의 영역에서 완성도를 증명하는 일인 것이다. 26-27쪽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해요. “우리에겐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술력이 필요하다.” 그다음 저자는 팔리는 책이 가지는 세 가지 속성을 제시합니다. 전복성, 충분성, 미래 지향성.
독자로 하여금 ‘어? 이게 무슨 말이지?’ 호기심을 일게 하는 전복성을 지니고 있는가. ‘오, 이 정도면 한 권 사서 소쟁해도 되겠다’ 싶은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는가. ‘그래, 나도 더 멋진 내가 될 수 있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게 될 거야’ 미래를 꿈꾸는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는가. 38쪽
전복적이고 충분하고 미래 지향적인 책을 만들면 중쇄를 찍을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해서 책을 만드는 “기술력”이 이 세 가지 속성으로 연결되는지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책이 표지와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언급해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복성은 메시지(표지), 충분성은 본문, 미래지향성은 브랜드에 대한 속성이니까요.
이 책에서 특히 도움이 되었던 요령은 바로 제목 짓기입니다. 독서 노트의 절반이 제목 짓기에 관한 내용이에요. 지금까지 다른 기획 책에서는 책의 제목 짓기에 참고할 만한 조언을 찾기 어려웠거든요.
저자가 제시하는 좋은 제목은 전복적인 제목인데요. 전복적인 제목을 짓는 요령은 다음과 같아요.
나는 1) 책의 핵심어와 2) 해당 핵심어의 지향점을 3) 최대한 낯설게 조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진화생물학이 설명하는 아름다움의 조건’이 주제라면 <우리는 꼬리 치기 위해 탄생했다: 아름다움이 욕망하는 것들>과 같이 제목을 짓는 식이다. 68쪽
이런 제목을 짓기 위해서 제목안을 쓰는 요령도 알려주고 있는데요. 저도 이 요령을 참고해서, 앞으로 제목안을 백 개 이상 쓰기로 다짐했어요(과연?).
대체로 제목안에는 1) 담당자가 생각하는 제목안의 핵심 키워드 2) 담당자가 선정한 유력안 3) 해당 유력안을 선정한 이유나 배경 4) 유력안 외에 각각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수십 개, 가능하다면 백 개 단위의 제목을 정리한다. 95쪽
정리하면 이 책은 편집자가 (다른 외부 요인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책을 전복적이고, 충분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만들 때 중쇄를 찍을 수 있다고 주장해요. 속성을 세 가지로 정리하니까 기억하기 쉽죠?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렇게 말해요. 저는 이 말이 특히 머릿속을 파고 들었어요. “내가 만드는 책의 가장 큰 브랜드는 바로 나여야 한다는 생각”(133쪽). 책이 권순범이라는 편집자를 거칠 때 어떤 가치를 얻게 되는가. 이게 요즘 저의 일 고민이에요.



